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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읽는 삶]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때 내 품에는/ 얼마나 많은 빛들이 있었던가/ 바람이 풀밭을 스치면/ 풀밭의 그 수런댐으로 나는/ 이 세계 바깥까지/ 얼마나 길게 투명한 개울을/ 만들 수 있었던가/ (…)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그때는 내 품에 또한/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모서리들이/ 옹색하게 살았던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래 그 옆에서 숨죽일 무렵   -장석남 시인의 ‘옛 노트에서’부분       앵두나무는 장미목과의 낙엽 활엽관목으로 분홍색 혹은 흰색의 꽃이 피고 열매는 오뉴월 익는다. 앵두꽃의 꽃말은 ‘수줍음’이다. 가지에 빨간색 열매가 오종종히 달린다. 예전에는 울 밑에나 우물가 옆에 흔하던 나무인데 우물도 사라지고 울 밑도 귀해져서인지 요즘은 전보다 만나기 쉽지 않다.   아파트 현관 옆에 앵두가 익어가고 있다. 젊은 여자 둘이 깨금발을 하고 앵두를 몇 알 따서 손바닥 위에 놓고 즐겁게 재잘거린다. 한 알을 입에 물더니 “앵두가 익을 무렵 뭐 그런 시가 있잖아.” 한 여자가 말하자 “맞아, 맞아, 찾아보자”하며 얼른 휴대폰을 켜 검색을 한다. 문화센터에서 시를 배우고 있다고 하는데 둘 사이가 한 편의 시 같다.   그 모습이 친근하고 정겨워 나도 앵두 몇 알을 따서 입 안에 넣어본다. 시의 힘이란 놀랍다. 시가 준 이미지의 확장은 사물의 본체까지도 확장해 놓는다. 앵두는 맛으로 음미하기보다 그리움으로 느껴야 제맛을 알게 되는 듯 생각되니 말이다. 이 시가 발표된 지도 꽤 오래전인데 여전히 앵두를 보면 맘이 아리다.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이란 구절에서 울컥해지던 사십 대가 스멀스멀 몰려온다.     누구나 리즈시절이라고 할 만한 생의 한때가 있었다. 황금기는 못되었을지라도 젊음의 피가 원활하게 돌던 때는 무수한 빛들에 휘감겼다. 무한 상속되어 허투루 써도 되는 것 같아 낭비인 줄도 모르고 써대던 시간이나 마음의 뒤란에서 수런거리며 부유하던 열망이 솟구치던 때가 있었다. 그 시절을 보내고 그리움에 휘둘리지 않아도 되는 때, 아무렇지도 않은 때가 앵두가 익을 무렵이라니.     미래라는 아득한 헛것에 취해 무작정 걷던 길 위에서 마주치던 인연들, 그것은 사람이 되었건 장소가 되었건 다 그리움으로 남아 갈대처럼 서걱댄다. 시간을 견딘다는 말에는 쓸쓸한 권태가 남아 있지만 그 견딤의 시간 안에는 ‘간신히’라는 다행스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한 열매가 빨갛게 익어 있기도 하다.   그렇게 간신히 너를 잊고, 그 시간을 잊고, 그 장소를 잊을 수 있게 될 무렵이 앵두가 익을 무렵이더라는 시인의 성찰은 눈부시면서도 측은하다. 그리움이란 어딘가에서 발원하여 어딘가로 흘러간 흔적들, 남겨진 날들에 볼모로 남아 줄기차게 가슴을 훑는 후폭풍이지만 살아온 날들이, 살아온 날들만이 남길 수 있는 선물이기도 하다.     사람이 태어나고 성장기를 보낸 곳에는 그 과정이 떨 군 먼지조차도 다 그리움으로 남는다. 더군다나 오랜 타국생활로 그리움에 중독되어 있다 돌아와 보면 낯익음 속에 깃든 낯섦도 별나고 반갑다. 고향에서는 좀체 저항할 수 없는 지존 앞에서처럼 몸이 낮아지기도 한다.   유채꽃이 진 자리 옆으로 피어나기 시작하는 코스모스, 자두가 익어가는 과수원 길, 한옥 흙 마당 싸리비질 자국, 초등학교 앞 문방구, 쓰던 가전제품을 산다는 한낮의 소음까지도 다 그리움의 프레임 안으로 모여들어 숨을 고르게 된다. 조성자 / 시인시로 읽는 삶 앵두가 남아 갈대 장석남 시인 빨간색 열매

2023-06-20

[시로 읽는 삶] 삶의 행간을 읽다

요만큼이라도/ 좀 쉬었다가 갔으면 해서/ 행간을 둬 놓았습니다// 쉬엄쉬엄 가야만/ 후회할 일도 덜 생길 거고/ 생각도 더/ 영글 게 아니겠습니까// 노상 빨리빨리/ 서둘러 살아온 삶이라서/ 많이도 후회되고/ 낭패도 많았답니다// 좀 늦기는 해도 앞으로는/ 숨 고르는 일만 남았답니다.   -김시철 시인의 ‘행간(行間)’ 전문       행간이란 글의 줄 또는 행 사이를 말한다. 쓰거나 인쇄한 글의 줄과 줄 사이, 또는 행과 행 사이의 공간이다. 글에 직접적으로 표현되지는 않으나 저자가 실제로 나타내려는 숨은 뜻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명석한 독서법은 행간을 잘 읽어내는 일이다. 특히 시 읽기에 있어서는 행간에 숨어 있는 참 의미를 찾아내는 일은 중요한데 상당한 독서 훈련이 되어 있어야 가능하겠다. 저자와 독자와의 눈높이나 지적 안목의 차이가 커도 행간에 감춰진 의미를 해석하기는 쉽지 않다.     행간을 이해하려면 사고의 확장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 분야의 일정한 지식과 더불어 사고의 영역이 넓어야 한다. 행간을 잘 이해해야 고도의 문해력에 도달할 수 있는데 글도 말도 행간을 정확하게 읽어내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행간을 읽는다는 말은 행간에 숨은 의미만을 찾아내는 것이라기보다 문장의 전후 맥락을 감각·지각적으로 아울러 이해하는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몇 해 전이다. ‘동백꽃 필 무렵’이란 TV 드라마가 있었는데 그 드라마에 “넌 사람이 행간이 없잖아”라는 대사가 있었다. 영리하지는 못하지만 비교적 한 솔직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쓰인 것 같은데 행간이란 말에 익숙하지 않은 젊은 세대들이 이 단어를 찾아보느라 검색어 1위에 오른 적이 있었다.   말의 쓰임새란 놀랍다. 행간에 무엇을 배치해 두지 않고 글자 고유성만으로 소통하려는 것처럼 사심이 제거된 순수한 사람을 행간이 없다는 말로 표현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작가의 언어 조탁 능력에 감탄되기도 했다.   김시철 시인은 행간이란 말에 다른 의미를 제시한다. 행간은 쉼의 자리이기도 하다. 직진만이 관건이 되는 일상에 숨을 고를 수 있는 시간적 공간을, 빨리빨리에서 비켜나 좀 여유를 주고 싶다고 한다. 그래야 생각도 더 여물 것이고 삶이 던지는 질문들을 경청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행을 바꿔야 할 때가 있다. 의미를 저장하려는 치밀함 말고도 숨을 고르기 위해서이거나 후회나 다짐의 때에 행을 바꾸고 싶어진다. 문장에 마침표를 꾹 찍고 나서 심기일전 행을 바꾸기도 있지만 피로감이 누적되어 쉼표를 찍고 행을 바꿔 보고 싶기도 하다.     행과 행 사이는 너무 멀어도 너무 가까워도 안 된다고 생각된다. 너무 멀면 의미의 연속성이 흐릿하고 너무 가까우면 전체를 보지 못하기도 할 것이다.   사람을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행간을 알아야 한다. 삶의 내력이 사건 중심으로 적힌 이력을 보고 그 사람을 안다고 할 수는 없다. 사람의 인생 행간에는 뜨겁거나 아프거나 아니면 가장 치명적인 무엇이 불립문자처럼 스며있기도 하다.   어머니와의 이별을 준비하면서 나는 비로소 어머니 삶의 행간에 주목한다. 행간에 고여 있는 눈물을 바라본다. 언제까지 받기만 해도 되는 줄 알았던 사랑 뒤에 숨어 있던, 생을 관통하던 어머니의 아픔이 이제야 선명하게 보인다. 조성자 / 시인시로 읽는 삶 행간 인생 행간 김시철 시인 시간적 공간

2023-06-06

[시로 읽는 삶] 봄 운동회

둥둥 북소리에/ 만국기가 오르면/ 온 마을엔 인화(人花)가 핀다//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연신 터지는/ 출발 신호에/ 땅이 흔들린다// 차일 친 골목엔/ 자잘한 웃음이 퍼지고/ 아이들은 쏟아지는 과일에/ 떡타령도 잊었다// (…)온갖 산들이/ 모두 다 고개를 늘이면/ 바람은 어느새 골목으로 왔다가/ 오색 테이프를 몰고 갔다   -이성교 시인의 ‘가을 운동회’ 부분       교문 위에 ‘어울림 한마당 운동회’라는 플래카드가 걸린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운동회가 열린다. 코로나로 삼 년 여 만에 열리는 운동회라고 한다. 전광판에는 미세먼지 제로, 일산화탄소 없음, 아황산가스 없음 등의 알림 표시가운동회 하기 최적의 날씨임을 입증이라도 하듯 번쩍인다.   만국기가 날리는 운동장, 학생대표가 개회 선서를 하고 준비체조로 운동회는 시작된다.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 신나는 음악에 맞춰 한바탕 춤을 추는데 K팝 본고장의 지존들답게 선생님이나 학생들이나 춤 솜씨가 예사가 아니다.     아직도 완전히 마스크를 벗지는 못했지만 코로나로삼 년씩이나 함께 어울려 뛰놀지 못하던 아이들에게 이 운동회는 오월처럼 푸르고 신나는 날인 듯싶다.     청군과 백군 앞에 당당히 선 응원단장은 제법 멋진 제스처로 함성을 끌어낸다. 공굴리기, 이름도 생소한 바가지 쌓기, 장애물 건너기 등으로 경기가 이어진다. 운동회의 꽃은 뭐니 뭐니 해도 달리기가 아닐까. 400 계주는 운동회의 꽃이다.     아이들의 함성으로 고조된 분위기가 요즘 지친 내게 기운을 돋아 주는 것 같기도 해서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하고 끝까지 구경했다. 연신 사진을 찍고 있는 외국인이 있어 말을 걸어 보았다. 카자흐스탄에서 한국 남성과 결혼한 딸을 보려고 한국에 왔다고 한다. 애들 부모가 바빠서 손녀를 돌봐주며 한국어 공부를 하고 있다고도 하는데 손녀딸과 함께하는 운동회가 좋은 추억이 될 거라며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할머니의 역할은 어디 민족에게나 전천후인가보다.   예전에는 운동회가 주로 가을에 열었었는데 요즘은 봄에도 열린다. 운동회는 학생들뿐만이 아니라 동네 사람들이 함께하는 유일한 고을 축제였다. 모처럼 일손을 놓고 구경 온 가족들과 돗자리를 펴고 나무그늘에 앉아 김밥과 사이다를 맘껏 먹을 수 있고 부모님들의 응원을 받으며 으스대보기도 하는 날이기도 했다. 달리기를 곧잘 하던 나는 400 이어달리기 마지막 주자가 되어 힘껏 달리던 기억이 새로워 운동회를 보는 내내 신이 나기도 했다.   행복감을 느끼게 해 주는 삶의 긍정성은 어릴 적 환경에 기인하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기질이나 성격은 타고나기도 하지만 행복이나 아름다움을 받아들이는 흡입력은 행복한 유년의 밭에서 커진다고 한다.     유년기란 한 인생을 지탱해주는 지지대와도 같은 시간이다. 행복한 아이가 행복한 어른이 된다. 아이들이 마음의 부침 없이 자라야 하는 이유다. 아이들의 행복을 지켜줘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즐거운 함성으로 부픈 오늘은 아이들의 기억창고에 행복하게 저장될 것이다.     길을 지나다가 마주친 운동회는 오래된 동화책을 창고에서 찾아낸 때와 같다. 나도 한때 어린아이였다는 게 사실이면서도 기이하고 낯설다. 나이라는 흔들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초원을 달리고 싶은 오월이다. 조성자 / 시인시로 읽는 삶 운동회 표시가운동회 하기 준비체조로 운동회 가을 운동회

2023-05-23

[시로 읽는 삶] 허무의 큰 괄호 안에서

꽃이나 잎은/ 아무리 아름답게 피어도/ 오래 가지 못하고/ 결국은 지고 만다.// 그런데도 滅亡을 알면서도/ 연방 피어서는/ 야단으로 아우성을 지른다.// (…)아, 사람도 그 영광이/ 물거품 같은 것인데도 잠시/ 虛無의 큰 괄호 안에서 빛날 뿐이다.   -박재삼 시인의 ‘虛無의 큰 괄호 안에서’ 부분       하고 싶은 말을 한꺼번에 쏟아내듯 꽃들이 만개한다. 개나리꽃은 개나리의 말을, 목련꽃은 목련의 말을 수화처럼 하더니 이제 벚꽃이 뒤를 잇는다. 꽃의 속내를 다 알아차릴 수는 없지만 그 눈부심만으로도, 그 찬란함만으로도 꽃이 전하는 말을 어림잡아 볼 수 있겠다.   꽃은 꽃으로 피려고 얼마나 많은 시간 모진 담금질을 해왔을까. 차가운 땅 밑에서 혁명을 도모하듯 발버둥을 친 것은 아닐까. 한 번쯤 세상에 던지고 싶은 말을 준비하느라 치열한 시간을 보내고 봄 어느 날 잠깐 피었다가 산화하듯 지고 만다.     난분분 흩날리는 꽃그늘 아래 앉고 보니 사람도 허무의 큰 괄호 안에서 잠깐 빛날 뿐이라는 옛 시인의 말이 어떤 울림처럼 다가온다. 꽃이 지는 것이 허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싶다가도 꽃의 유한함을 생각해 본다면 허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싶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인생의 사계절을 살아가는 일은 지극히 숭고한 일임에 틀림없다. 한때 꽃처럼 빛났든 그렇지 못했든지 상관없이 지금까지 살아온 것만으로도 지극한 일이지 않은가. 그러나 사람이 죽음을 피할 길이 없으므로 그 모든 게 덧없고 덧없다.     겨울이 지나고 해빙 무렵 지인 몇 분이 돌아가셨다. 죽음에서 예외가 되는 사람은 없다. 하늘의 뜻을 비껴갈자는 없으므로 우리의 인생도 허무의 큰 괄호에 묶여 있음은 자명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영원히 살 것처럼 치열하게 산다. 만개한 꽃이 어느 날 불어온 바람에 다 떨어지듯 사람도 아등바등 살다가 어느 순간 이승을 등진다.     ‘존재하는 어떤 것에도 의미가 없다’라고 해석되는 허무주의, 허무의 저류를 철저히 파헤쳐 하나의 명확한 사상으로 끌어올린 이는 독일 철학자 니체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허무에도 수동적 허무와 능동적 허무의 두 유형이 있다. 허무의 현실을 초극하려는 노력이 능동적 허무라고 규정한다. 능동적 허무란 허무를 단순한 생의 소모 원리가 아닌 적극적인 창조원리로 전환해 나가는 방식이다. 능동적 허무야말로 허무의 지배 아래서 앓고 있는 현대인들이 취할 마땅한 생활방식이라는 것이다.     허무란 자칫 허무의 늪에 빠져 찰나적 향락이나 소모적 생활로 병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허무를 직시하고 수동성을 넘어서 능동적인 측면으로 다가간다면 삶의 또 다른 에너지가 될 수도 있다. 존재의 유한성 때문에 허무가 찾아오지만 허무의 능동적인 측면에 기대 바라볼 때 그 유한함 때문에 사람도 소중하고 꽃도 더 아름다운 것 아닐까 생각된다. 태어나는 것은 반드시 죽는 존재의 한계성 때문에 우리는 더 치열해질 수 있다. 허무를 체감하기 때문에 순간순간의 소중함을 알게 되고 순간의 가치를 놓치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하며 산다.   비록 허무의 괄호 안에서 빛날 뿐인, 잠깐 피었다 지는 꽃일지라도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서 아우성을 치는 일은 얼마나 값진 일인가. 한 송이 꽃이 되어 야단을 떠는 일은 또 얼마나 숭고한 일인가. 이 봄, 벚꽃 날리는 공원을 거닐며 두근거리는 심장의 박동을 느끼며 환호하는 것은 꽃들도 언젠가는 지고 나도 언젠가는 떠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오늘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진즉에 알기 때문이다. 조성자 / 시인시로 읽는 삶 괄호 능동적 허무 박재삼 시인 소모적 생활

2023-04-25

[시로 읽는 삶] 시 쓰는 인공지능

달리는 구름과 바람은/ 잠든 적이 없는 창을 때리고/ 모든 문을 열고// 마침내 사랑으로 나를 감싸도// 나는 어둠 속에서/ 나의 그대를 본다   -인공지능이 쓴 시 ‘우리의 봄은 끝났다’ 전문   챗GPT가 요즘 화재다. 카카오톡에 연결해 쉽게 사용할 수 있다고 해서 시도해 봤다. 어렵지는 않았다. 그리고 편리했다. 별별 질문을 척척 답해주는 박사다. 물론 사용약관에는 OpenAI가 제공하는 답변이 부정확하거나 부적절할 수 있다는 경고가 들어 있기는 하다.   챗GPT에게 물어보았다. ‘뉴저지에서 가볼 만 한 강은 어디인가?’ ‘뉴저지에는 가볼 만 한 강이 많지만, 대표적으로 델라웨어 강과 라만타 강이 있습니다. 델라웨어 강은 팰리세이즈 스테이트 파크 내에 위치하며, 라만타 강은 팰리세이즈네이셔널 월드 앤 스프림스 지역에 위치합니다. 두 강 모두 하이킹, 자전거 타기, 캠핑, 낚시 등 야외활동을 즐길 수 있는 좋은 장소입니다’라는 답이 나왔다.   ‘밤에 듣기 좋은 클래식 음악 말해줘?’라고 묻자 ‘1. 베토벤 교향곡 9번, 2. 드뷔시-클레르드루나, 3. 바하-평화 칸타타, 4. 쇼팽-녹턴, 5. 라흐마니노프-전주곡 1번, 6. 비발디-사계 중 겨울, 7. 쇼스타코비치-피아노 소나타 2번, 8. 모차르트-아다지오, 9. 프랑-할리크의 노래, 10. 슈베르트 교향곡 8번’이라고 즉각 답을 한다.   이런 지식적인 거야 즉각 답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되기도 하지만 시를 하나 지어 달라고 해도 지체 않고 지어내는 건 뭔가.   ‘봄에 어울리는 시를 지어 줘’라고 묻자 ‘봄날이 왔다, 희망의 계절/ 꽃들이 피어나고 새들이 노래한다/ 어둠과 추위를 물리치고/ 봄바람이 나를 감싼다// 너도 이 봄바람처럼 부풀어 오르고/ 새로운 꿈을 향해 날아올라라/ 희망의 빛으로 물든 이 봄/ 너의 인생도 더욱 화사해질 것이다.’라는 시를 지어낸다.   시 한 편을 완성하기 위해 시인은 꽤 많은 시간 공을 들인다. 쓰고 고치기를 수없이 반복한다. 퇴고를 여러 번 거쳐 완성했어도 좋은 시가 되는 건 아니다. 그런데 인공지능이 시 한 편 완성하는데 드는 시간은 초 단위다. 아주 즉각적이고 서슴없다.     시 쓰는 인공지능 ‘시아’가 탄생한 것은 벌써 전이다. 시아는 인터넷 백과사전과 뉴스 등을 읽으며 한국어를 공부했고 1만3000여 편에 달하는 시를 읽으며 작법을 배워 시를 쓸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주제어와 명령어만 입력하면 정보의 맥락을 이해하고 곧바로 시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써진 시들이 ‘시를 쓰는 이유’라는 시집으로 묶여 출간되기도 했다.     인공지능이 시나 소설을 쓰고 영화 시나리오를 완성하는 게 더는 뉴스도 아니다. 신문기사는 물론 그림이나 작곡도 해내고 있어 SF적 상상력의 세계가 아니라 일상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다. 예술과 과학의 협업, 인공지능이 예술이라는 분야에 접목되어 예술의 영역이 얼마나 넓어질지는 알 수 없겠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1만3000여 편이나 시를 읽으면서 시 작법을 공부했다니 실력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얼마나 더 시적 기량이 향상될 건지도 예측할 수 없겠다. 인공지능에게 인간이 위협당하는 건 사실이리라.   그렇지만 예술이란 삶이 우려내는 향기다. 사람살이의 희로애락이 자아낸 색채 같은 것, 시가 함축된 문장의 조합만은 아니잖은가. 엄밀히 말해 인공지능이 쓴 시란 데이터에 의한 언어조합일 뿐이다. 조성자 / 시인시로 읽는 삶 인공지능 협업 인공지능 예술과 과학 슈베르트 교향곡

2023-04-11

[시로 읽는 삶] 요리하는 남자

무밥 한 그릇이/ 소반 위에 놓여 있다/ 소반이 적막하여서/ 무밥도 적막하여서/ 송송 채를 썬/ 흰 무의 무른 살에 스민/ 뜨거움도 적막하여서/ (…)/ 가난하게 적막하여서/ 들척지근하고 삼삼한/ 이 한 저녁을/ 나는 달그락달그락/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안도현 시인의 ‘무밥’ 부분     요즘은 요리 잘하는 남자가 대세다.     젊은 남자들은 웬만한 것은 직접 만들어 먹는다. 요리하는 일에 거부감도 적고 부엌일을 하는 게 어색하지도 않아 보인다. 연애의 수순에도 남자가 여자를 위해 정갈하게 식탁을 꾸미고 스파게티를 만들어 함께 즐기는 게 포함된 모양이다. 스파게티가 한국음식보다는 낭만적인 걸까 아니면 만들기가 좀 쉬워서일까, 하여간 스파게티를 만드는 남자의 매력이 요즘 부쩍 부각되고 있다.     얼마 전 꽤 잘나가는 전문직 종사자인 후배를 만났다. 아직 미혼이어서 결혼 상대로 어떤 사람을 원하느냐고 물어보았는데 거침없이 요리 잘하는 남자면 좋겠다고 해서 좀 놀라웠다.   젊은 세대와는 다르게 연배가 있는 남자들은 변하는 세상을 마뜩잖아 한다. 은퇴하고 남자들이 제일 못 견뎌 하는 것은, 가장으로서의 대접이 소홀해졌다는 서운함이라고 한다. 아내가 아침밥을 소홀하게 챙기고, 외출해선 식사 때가 되도 돌아오지 않는다고 불만을 한다.   퇴직하면 그동안의 노고로 지친 몸과 마음을 편히 쉬면서 가족의 전폭적인 지지와 위로를 받으려니 했는데 현실은 좀 냉랭한 것이 슬프다고도 한다. 당연하겠다. 가족을 위해 평생 일만 해온 아빠들, 박수를 받아 마땅하고 아내와 자녀들의 존경이 필요하다.     그렇긴 한데 매 끼니를 책임져온 아내들의 입장도 이해해 줘야 한다. 식구들이 ‘오늘 저녁 뭐 먹지?’라는 소리만 나오면 혈압이 오른다는 젊은 주부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도 세 아이를 키우면서 때마다 뭔가를 먹여야 하는 게 큰 부담이었다. 먹을거리가 흔한 세상이긴 하지만 뭔가를 준비해 식탁에 내놓는다는 건 만만한 일은 아니다.     해본 적 없는 사람의 음식 만들기는 쉽게 엄두가 나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비교적 간단하고 쉬운 아침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커피를 끓이고 토스트를 구워내는 일은 숙련의 문제가 아니고 성의의 문제다. 은퇴하고 시간이 많아진 남편이 오랫동안 밥을 지어내던 아내를 위해 아침 식사 정도 준비하는 것은 상대에 대한 배려심이면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전보다 시간이 자유로워진 내 남편은 음식을 만들어 보려고 시도를 한다. 요리책을 사기도 하고 음식 유튜브를 보기도 한다. 아이들에게 아빠표 음식 하나 정도는 추억으로 남겨주고 싶다고 노력 중인데 아직 성과는 미미하다. 달라진 것은 아침에 커피를 내리는 일, 토스트를 굽는 일은 이제 손에 익은 듯하다. 딸에게 샐러드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 그런데 그 과정이 예상 밖으로 즐겁고 뿌듯하더라는 것이다. 음식을 만들어 보는 일은 그동안 해오던 밖의 일과는 달라서 도취되는 기분이 괜찮더라고 한다.   관성이 깨지는 곳이 새로운 모색의 출발점이다. 남자의 부엌일도 그런 측면에서 권장해볼 만하다. 더군다나 은퇴 후의 남자라면 부엌일이 가장의 권위를 추락시키는 것이 아니고 더 존중되는 반사이익을 얻게 될 것이다. 밥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는 아내를 위해 남편이 챙겨주는 아침 한 끼는 감동일 것이다. 아내의 행복지수를 높여주고 가정의 체감온도 역시 상승할 것이다. 조성자 / 시인시로 읽는 삶 요리 남자 아빠표 음식 음식 유튜브 음식 만들기

2023-03-28

[시로 읽는 삶] 색깔의 유혹

아무래도 나는 빨강이 되어가는 중이다// 빨강을 만난 건 겨울이었으나 겨울이 아니었더라도, 그 흰 눈 위에 떨어진 핏방울 혹은 얼음 속의 불// 우리는 잠시 스쳤을 뿐인데// 묻었나봐/ 꼭 여며두었던 소매 끝이거나 긴 목도리의 한쪽/ 열꽃이 번지고// 나는 사흘에 한 번 빨강을 앓고 하루에 한 번 그를 앓으며// 빨강이 되어간다/ 빨강은 얼어붙은 불이거나 불타는 얼음(…)   -유병록 시인의 ‘빨강’ 부분     코로나가 시작되고 우울감이 가중되던 때 빨간색으로 차를 바꿨다. 토스터도 커피포트도. 세상이 다 칙칙해 보이고  마음도 바닥으로만 길을 내서 빨강이면 좀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았다. 주위에서는 웬 빨강, 하면서 빨강색 차는 도난의 위험도 크다고 하고 너무 튀는 것 아니냐며 다소 의아해했다.   빨간색 차가 우울감을 해소하는 데 공헌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빨강의 역할로  좀은 기분이 나아지기도 한 것 같다. 코로나라는 터널을 어둡지만은 않게 지내왔다고 생각된다. 얼어붙은 불이거나 불타는 얼음으로 표현되는 빨강의 내부에는 생명력이 잠재해 있음은 확실하다.   ‘색채의 향연’ (장석주 지음)은 색에 관한 통찰이 매력적인 책이다. 색에 관한 작가의 관찰이 남다르다. 지은이는 “사람이 식별할 수 있는 색깔은 1000개 정도다. 놀라지 마시라, 디지털 기술로 빛의 삼원색을 조합해서 만들 수 있는 색깔은 1600개! 이토록 많은 색깔은 저마다 만물과 조응하면서 마음 깊은 곳 금(琴)을 울린다. 색깔은 오감과 비벼지면서 감정과 심리에 영향을 미치고, 사람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다”고 기술했다.   그 많은 색깔 중에서도 빨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빨강은 생명의 원점이다. 생명은 무엇으로도 대체가 불가능한 절대 가치에 속한다. 그래서 빨강은 고귀하다. 빨강은 이성을 압도하는 본성의 색깔이다, 열정과 희열은 검정도 아니요 노랑도 아닌 빨강을 타고 온다. 빨강은 사랑과 열정의 신호색이다”   적색은 가시광선 중에서 가장 긴 파장을 가지고 있다. 갓난아이에게 가장 먼저 인지되는 색이라고 한다. 인류가 찾아낸 대표적인 빨강의 원천은 진드기류의 빨간색을 띤 벌레였다. 그중에서도 질 좋은 빨강을 제공하는 ‘코치닐’은 최상이다. ‘코치닐’은 선인장에 기생하는 연지벌레로 붉은색을 띠는 암컷만을 말린 후 붉은 색소로 사용된다.     에너지와 생명의 상징인 빨강, 그러나 부정적인 측면도 크다. 격렬, 폭력, 무자비, 혈투, 전쟁, 파괴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빨강의 문화사’를 쓴 스파이크 버클로(회화복원 전문가)는 신화, 종교, 과학, 언어학, 고고학, 인류학, 미슬 등 다양한 분야에 걸친 빨강의 변화무쌍한 일대기를 추적한다. 그에 의하면 오늘날 붉은 깃발은 흔히 공산주의, 좌파, 혁명, 노동자를 상징한다. 이는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한 러시아 볼셰비키와 중국 공산당 등이 붉은색을 상징으로 삼은 탓이다.   하지만 사실 빨강은 각 나라의 국기에서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색이다. 전 세계 80%의 국기에 빨간색이 포함되어 있다. 빨강은 혁명의 색 이전에 왕의 위엄과 헌신, 정치적인 인내심을 나타내는 색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빨강은 왕실과 귀족들이 선호하는 색이었다.     흰색에서 검정에 이르기까지 잦아들고, 내치고, 부딪치면서 탄생했을 색깔들, 밝고 부드러운 색과 차고 서늘한 색들이 대치하지 않고 스며들어 가며 봄은 색깔을 탄생시킨다. 조성자 / 시인시로 읽는 삶 색깔 사실 빨강 사회주의 혁명 디지털 기술

2023-03-14

[시로 읽는 삶] 친구

좋은 일이 없는 것이 불행한 것이 아니라/ 나쁜 일이 없는 것이 다행한 거야./ 어느 날 친구가 내게 말했습니다./ 되는 일이 없다고 세상이나 원망하던/ 나는 부끄러웠습니다.// (…)자기 하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은/ 실상의 빛을 가려버리는 거야./ 어느 날 친구가 내게 말했습니다./ 되는 일이 없다고 세상에 발길질이나 하던/ 나는 부끄러웠습니다.   -천양희 시인의 ‘친구’ 부분     도반(道伴)은 불가에서 쓰는 말로 ‘같은 길을 서로 도우면서 함께 가는 좋은 벗, 도(道)로써 사귄 친구’란 뜻이다. 일반적으로 쓰는 벗, 친구, 선우, 동무 등과 별반 다르지는 않은 뜻이리라.     나는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언제부턴가 이 도반이란 말이 좋다. 벗이나 친구라는 말도 정겹지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끌어주고 밀어주며 나란히 걷는 수행자의 모습을 연상하게 해서인지 도반이란 말이 듬직하게 여겨진다.   도반이라는 말에서는 서늘한 안도감이 있다. 인생의 큰 깨달음을 찾아가는 길에서, 넘어지고 주저앉을 만큼 힘이 들고 지쳐있을 때 위로를 건네기도 하지만 마음의 산란을 이기지 못하고 방황할 때는 가차 없이 질타하기도 하는 바르고 꼿꼿한 벗이라는 의미 내포가 크다고 생각되어서인듯하다.   어느 강연회에서 문정희 시인은 문학을 하면서 진정한 도반을 만나기 어려웠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 문학의 길은 수행자의 길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누구나 글을 쓰고 책을 내는 시대이긴 하지만 여전히 문학이란 지난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동굴을 더듬거리며 걷는 외길이다. 그래서 함께할 사람이 필요하고 문우(文友)라는 믿음직한 명칭을 쓰기도 한다.   문학은 민족이나 개인의 정서가 동반되는, 삶을 미적으로 재해석하는 일이기도 하다. 깊은 통찰력으로 면밀히 들여다보며 숨어 있는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길이다. 그래서 외로운 길이기도 하다. 언제고 그 자리에서 격려와 질타를, 사랑과 매를 내리칠 친구가 있다면 아무리 고단한 여정이라도 좀은 수월하기도 할 터이다.   멀고 험한 인생의 목적지를 바라보며 뜻을 맞춰가는 동행자인 친구, 삶의 가치를 공유하며 흐린 날이나 갠 날이나 나란히 걸어갈 수 있는 친구가 있는 사람은 인생의 반은 성취한 사람이라고 한다. 부끄러움을 일깨워 주는 친구가 있는 사람은 경전 한 권을 탐독한 것과 다를 게 없을 것이다.     일등만이 승자로 살아남는 지나친 경쟁시대, 우리는 서로에게 경쟁자가 되는 위기감 속에  있다. 벗으로의 관계를 잘 유지하며 지내다가도 결승점에 이르면 경쟁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관계가 되는 살벌한 현실에 직면하곤 한다.     나이가 들수록 친구를 사귀기가 어렵다고 한다. 외로움을 호소하면서도 친구를 사귀며 부대끼기보다 외로운 쪽을 택하기도 한다. 좋은 친구를 얻는다는 건 나도 누군가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인데, 친구를 염원하지만 정작 나는 누구에게 진정한 친구가 되려는 일에는 인색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삶의 지지대가 되어주는 도반과도 같은 친구를 떠올려보는 일은 뭉클하다. 절망의 고비를 견뎌낼 수 있게 해주는 친구, 응원을 아끼지 않는 묵묵한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당신은 꽤 괜찮은 인생을 사는 것이리라. 조성자 / 시인시로 읽는 삶 친구 친구 응원 친구 선우 천양희 시인

2023-02-28

[시로 읽는 삶] 자연으로 돌아가는 길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 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 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 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군산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 다오// (…)바람 이불처럼 덮고/ 화장(化粧)도 해탈(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다오   -황동규 시인의 ‘풍장 1’ 부분     풍장은 시체를 지상에 노출해 자연히 소멸시키는 장례법이다. 바람에 말리는 방식이라고나 할까. 풍장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 모양이다. 수장(나무 꼭대기나 나뭇가지 사이에 시체를 둠), 초장(짚으로 말아 놓아둠), 대상장(시렁 같은 것에 올려놓음), 동굴장(동굴 안에 안치) 등등.   죽으면 누구나 자연으로 돌아간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길, 흙이 되어가는 과정도 점점 다양해져 가고 있다. 일반적이고 보편화 되어 왔던 것이 매장, 화장, 자연장이다. 그런데 이즈음에 들어 흙으로 돌아가는 길도 편리함과 효용성의 여타를 생각하게 된 것 같다.     최근 ‘퇴비장’이란 말을 가끔 듣는다. 말 그대로 시신을 썩혀 거름으로 사용한다는 말이다. 뉴욕주가 지난해, 주검을 거름으로 활용하는 퇴비장을 허가했다고 한다. 퇴비장이란 시신을 자연 분해한 뒤 퇴비용 흙으로 만들어 사용하는 방식이다. 자연적 유기물환원법이다.     미국에선 2018년 워싱턴주를 시작으로 콜로라도주, 오리건주, 버몬트주, 캘리포니아주가 도입키로 했고 뉴욕주도 퇴비장을 합법화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법의학계에 따르면 관에 들어 있는 시신은 평균적으로 부패를 통해 분해되기 시작해 뼈만 남는 데에 최대 10년이 걸린다. 이에 비해 관이 없는 상태에서는 시신이 모두 썩는 데 5년이 걸린다. 뼈까지 완전히 분해되기까지는 수십 년의 시간이 더 걸린다. 사람이 죽으면 혈액을 통한 산소 공급이 멈추면서 세포가 죽고 스스로 분해되기 시작하는데 분해 과정을 통해 천천히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반면 퇴비장은 개방된 공간에 시신을 놓고 나무 조각, 풀, 산소를 넣어 시신 분해 속도를 빠르게 하는 방식이다. 미국의 퇴비장 서비스업체인 ‘리컴포즈(Recompose)’에 의하면 10년 이상 걸리는 시신 분해 과정이 퇴비장을 하면 4주 정도면 끝난다고 한다. 얻어진 퇴비는 열처리한 후 나무나 꽃의 거름으로 사용된다. 인간 존엄을 두고 반대의 목소리도 크지만 실행하는 이들이 있다니 놀라울 뿐이다.     퇴비장은 시신을 태우는 화장보다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적고 매장처럼 토지가 필요하지 않아 친환경적인 장례방식이라고 한다. 퇴비장은 2005년 스웨덴에서 처음으로 합법화됐고 영국도 관 없이 자연에 매장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퇴비장 말고도 특이한 장례방식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다이아몬드장-사람의 유골에서 탄소를 추출하여 공업용 다이아몬드 제작 기법으로 다이아몬드를 만든다. 우주장-유골을 아주 작은 크기의 캡슐로 만들어 우주로 쏘아 올린다. 산호장-바닷속 생물이 서식하도록 고인의 유골을 빻은 뼛가루를 봉인해 인공 암초에 넣어둔다. 불꽃장-유골을 갈아 폭죽과 함께 쏘아 올려 터트린다. 유골은 폭죽과 함께 허공에서 산화하게 된다.     죽음을 통해 이 땅에서 사라지는 인간의 운명. 죽음은 사람의 뒷모습이다. 그래서 어떻게 사느냐 만큼 죽느냐가 중요한데 이제 죽어 흙이 되어 가는 길도 남겨진 사람들에게 어떤 이로움이 있느냐를 생각해 선택해야 하는 때가 온 것 같다. 조성자 / 시인시로 읽는 삶 자연 반면 퇴비장 매장 화장 이산화탄소 배출량

2023-02-14

[시로 읽는 삶] 삶은 계속된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것이 오늘 아무리 안 좋아 보여도/ 삶은 계속된다는 것을/ 내일이면 더 나아진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날마다 손을 뻗어 누군가와 접촉해야 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따뜻한 포옹,/ 혹은 그저 다정히 등을 두드려 주는 것도/ 좋아한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여전히 내가 배워야 할 것이 많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사람들은 당신이 한 말, 당신이 한 행동은 잊지만/ 당신이 그들에게 어떻게 느끼게 했는가는 결코 잊지 않는다는 것을   -마야 안젤루의 ‘나는 배웠다’ 부분       이 땅에서 유색인종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것도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만만치 않은 일이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인권이 보호되고 약자에 대한 법적 장치가 확보되었다는 미국이지만 아직도 유색인종은 무차별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길을 가다가 혹은 전철 안에서 묻지마 범죄를 당하기도 한다.     우리의 똑똑한 딸들이 사회 전반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활발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는 있지만 아직도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소외되기도 하고 그들의 역량만큼 존중받지 못하기도 한다.     미국 땅에서 유색인종이 불편함과 두려움 없이 살아갈 날은 언제인지, 있기는 할 것인지 묻게 된다. 언제까지 공격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묻게 된다.     “나는 배웠다”는 시인의 말은 모든 부조리와 차별의 과정에서 잘 견뎠다는 말이기도 하겠다. 그 모든 힘든 일들을 겪어 온 것이 허사가 아니었다는 말이기도 하겠다.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삶의 진정한 가치를 알게 된 때문이라는 말이기도 하겠다. 시에서의 배움이란 몸으로 체득한, 이마에 숱한 상처를 내면서도 맨땅의 헤딩을 하며 얻어진 지혜일 것이다. 그 배움이 있어 사람들과 따뜻하게 포옹할 수도 있었고 다정하게 등을 쓰다듬어 줄 수도 있게 되었다는 고백일 것이다.   워킹맘으로 투사처럼 살아가는 내 딸들은 종종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유리 천정의 실재를 느끼게 될 때 한없이 작아진다고 한다. 너무 높아 어쩔 도리가 없다고 느껴질 때의 낙심을 토로할 때가 있다. 그런데도 어떤 사회적 보호 장치에 기대기보다 헤딩을 잘할 수 있는 튼튼한 머리를 갖는 게 관건이라고 말하곤 한다. 어제보다는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좀은 나아진다는,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로 꿋꿋할 때 조금은 달라지리라는 믿음을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말한다.   어떤 악조건의 환경일지라도 아주 조금씩일지라도 진화하고 있다는 걸 우리는 안다. 현재 상황이 불합리하더라도 결코 실망할 일만은 않은 것이 이 때문이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차별과 편견은 있었다. 맞장을 뜰 용기와 담력으로 삶을 배워 나간다면 이겨내지 못할 것은 없다고 믿고 싶다.   우리의 하루하루는 몸으로 배워가고 있는 학습현장이다. 충돌하기도 하고 화해하기도 하는 그 모든 것들을 겪으면서 사람을 배우고 인생을 배우게 되니까 말이다. 악을 겪으면서 선을 배우게 되고 음지를 통해 양지를 알게도 되니 말이다.   마야 안젤루는(1928~2014) 유색인종의 차별이 유난히 심하던 시대를 꿋꿋하게 견디며 선구적으로 살아온 미국의 시인이자 소설가, 민권운동가이다. 토니 모리슨, 오프라 윈프리와 함께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흑인 여성 중 하나로 꼽힌다. 지난해 미국 조폐국은 마야 안젤루의 이미지가 새겨진 25센트 동전을 만들어 그녀를 기리고 있다. 조성자 / 시인시로 읽는 삶 무차별 공격 마야 안젤루 사회적 보호

2023-01-31

[시로 읽는 삶] 그때도 좋았고 지금도 좋다

길가에 서 있는 자두나무 가지로 만든/ 매운 칼 같은 향내,/ 입에 들어온 설탕 같은 키스들,/ 손가락 끝에서 미끄러지는 생기의 방울들,/ 달콤한 성적 과육,/ 안뜰, 건초더미, 으슥한/집들 속에 숨어 있는 마음 설레는 방들,/ 지난날 속에 잠자고 있는 요들,/ 높은 데서, 숨겨진 창에서 바라본/ 야생 초록의 골짜기:/ 빗속에서 뒤집어엎은  램프처럼/ 탁탁 튀며 타오르는 한창때.   -파블로 네루다의 ‘젊음’ 전문       연령층이 다른 중년 이후의 여자들 몇이서 만남을 가졌다. 대체로 연령대에 따라 관심사가 다르다. 50대는 아직 욕망의 잔해가 있다. 외모에 대해서도 포기가 없고 사회적 성취도에 대해서도 양보가 없다. 60대는 비교적 사는 일의 각박함을 내려놓기도 한다. 살아온 날들을 쓰다듬으며 하고 싶은 일들에 대한 열망으로 아직은 역동적이다. 70대는 말할 것도 없이 건강이 관건인 것 같다. 시간에 대해 초조함이 크다 보니 마음이 바빠지고 있다.     그런데 공통적인 것은 젊음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그리움이라고 했지만, 돌이킬 수 없는 시간에 대한 쓸쓸함이다. 70대는 십년만 젊어 육십이면 좋겠다고 말하고 60대는 오십만 되었어도 좋겠다고 한다. 50대는 사십이면 겁날 것이 뭐가 있을까 싶다고 했다.   나이에 관한 한 하나님도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보니 그저 아쉬움의 토로이겠으나 자기의 나이가 가장 위기의 나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래서 누구나 늘어가는 나이를 반갑게 맞이하기가 꽤 어려운 게 아닌가 싶다.   젊음의 말초신경은 미세한 것까지 감지되고 행동이나 사고력도 민첩하다. 생기의 물방울들이 파르르 떨려 삶의 기능은 절정에 이른다. 야생초록의 골짜기를 말처럼 달려가는 진취성이 있어 당돌하기까지 하고 설탕 같은 키스로 녹아내리는 육체는 단내를 풍긴다.     젊음은 생의 한창때인 어느 한 지점을 말하는 것이겠다. 젊음으로 표상되는 푸르름은 찬란하긴 했으나, 최고의 시절이었을 것이지만, 모든 청춘이 푸르지는 않았다. 신체적으로 왕성한, 피돌기가 빠르고 심장 박동은 거친, 그런 때 우린 얼마나 큰 혼돈을 겪기도 했었나. 지금 생각해보면 젊음은 반짝이는 순간임에는 틀림이 없다. 가장 좋은 때, 그래서 불안하고 불안정했는지도 모른다. 주어진 젊음을 맘껏 내 것이라고 누리지 못했다. 현실이라는 피치 못할 그물에 걸리기도 했겠으나 미래라는 불모의 세계는 우리를 과하게 끌어안기도 했다.   오늘은 내 생의 가장 젊은 날이다. 심지의 불이 타면서 초가 녹듯 젊음의 기운을 태워가며 늙는다면 우린 언제나 젊다. 탁탁 튀며 타오르는 한창때는 아닐지라도 계절을 느낄 오감이 살아있고 무엇이든 사랑할 수 있는 뛰는 심장이 있다. 아직 탐색해야 할 세계가 있고 아직 알아야 할 것들을 향한 열망이 있는 한 우리는 젊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좋았다. 퍼덕이는 날갯짓으로 충분했다. 지나간 날들, 거기에는 지금보다 앳됨이 있었고 꿈꾸던 것이 아직도 배회하고 있을 것이어서 매운 칼 같은 향내로 가끔 마음을 아리게 한다.   그때도 좋았지만 지금도 좋다. 주름진 모습으로 시간과의 화해를 모색하는, 내일보다는 젊은 오늘, 지금도 좋다. 이 말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날들에 대한 헌사이기도 하다.   파블로 네루다는 1971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칠레의 시인이다. 사회주의 정치가이기도 하다. 영화 ‘일 포스티노’는 네루다를 주인공으로 시인과 우편배달부의 우정이 아름다운 영화다. 조성자 / 시인시로 읽는 삶 파블로 네루다 사회주의 정치가 안뜰 건초더미

2023-01-17

[시로 읽는 삶] 좋은 궁수가 되려면

화살이 과녁을 맞추려면/ 이리저리 돌아갈 순 없다. 하지만 좋은 궁수는/ 거리와 바람을 수락한다./ 그러니 네가 과녁일 때 나는 조금 위를 겨눈다.   -울라브하우게 시인의 ‘조금 위를 겨눈다’ 전문   울라브하우게의 시를 새해 첫 시로 읽는다. 과녁을 향한 궁수의 활 조준은 얼마나 민감할 것인가. 한 치의 오차도 허락될 수 없는 긴장감 속에서, 그러나 좋은 궁수는 거리와 바람을 수락한다. 과녁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복병으로 등장하는 변수들을 가늠할 줄 알아야 한다. 거리와 바람을 염두에 두는 일은 인생의 목표지향점을 겨냥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필수이겠다.   새해에는 나도 활을 잡아보고 싶다. 과녁을 향해 전심을 다 하여 활을 당겨보고 싶다. 희망이라는 과녁을 향해 활을 당겨본 지가 언제였나 싶다. 거리와 바람을 기꺼이 수락할 줄 아는 궁수가 되어 어떤 목표이든 그것을 향해 나아가고 싶다.   과녁을 향해 활을 잡고 조준하던 시간이 내게도 아예 없지는 않았겠으나 명중에 이르지 못한 것을 바람의 탓으로 돌리곤 했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서풍 때문에, 예고 없이 불어온 북풍 때문에,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활은 빗나가고 늘 제자리에서 발을 구르는 모습이었다.   좋은 궁수는 거리와 바람을 수락한다는 시의 한 구절이 매사 이유가 많은 나에게는 통증처럼 스민다. 바람을 수락한다는 것은 바람의 변수와 방향을 예측하는 것이기도 하나 그것이 어떤 상황이든지 기꺼이 받아들이고도 중단 없이 나아가려는 의지일 것이다.     한 해의 시작에는 여러 다짐이 있겠다. 그 다짐들에 앞서 다시 한발을 날려보려고 새롭게 활을 잡는 궁수의 결기가 필요하겠다. 일 년에 한 번쯤은 일상의 권태를 몰아내는 일부터 삶의 전반을 아울러 되짚어보는 시간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새해라는 시간은 말끔하게 정리를 끝낸 책상에 앉아 다시 뭔가를 써가는 시간이다.   “그리고 네가 과녁일 때 나는 조금 위를 겨눈다”는 마지막 행은 나아갈 길의 목표를 조금 상향 조정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르게 한다. 점점 왜소해지는 존재감, 협소해지는 관계성, 탄력을 잃은 삶의 동력으로 너무 낮은 곳에서 엉거주춤했다. 발밑 세계에서 뭉쳐지다 녹는 눈사람처럼 사고력도, 신앙심도, 희망도 모두 그랬다. 그 좁은 안에서의 티격태격이 누추하게 여겨진다. 그 좁은 안에서의 설전이 무익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옹졸한 생각에 갇히고 야박한 인심에 묻혀 점점 작아지는 것 같던 날들에 대한 반성을 끌어내는 시를 만난 새해 아침. 눈을 들어 멀리 내다보는, 생각의 폭을 넓혀 깊고 다양하게 바라보려는 시도가 있을 때 좋은 궁수가 될 수 있다는 말로 이 시를 해석하고 싶다.   삶이 막막하고 점점 초라해진다고 생각될 때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건 뭘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한 구절의 시구로도 스멀스멀 힘이 솟기도 한다. 점점 작아지더라도 생각과 마음의 폭만은 작아지지 말자는 각오가 생기기도 한다.     울라브 하우게는 1908년 노르웨이 울 빅에서 태어나 1994년까지 그곳에서 과수원 농부로 평생 고향 마을 떠나지 않고 살았다고 한다. 그의 문학은 장소성에 뿌리를 두면서도 시공을 넘나드는 큰 스케일로 인간 실존을 투시하는 직관을 특징으로 한다. 젊어 한때 우울증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했으나 고통 중에도 품위를 읽지 않고 자연과의 교감을 통한 정갈한 시를 써서 슬픔에 처한 많은 이들에게 위로를 주었다. 조성자 / 시인시로 읽는 삶 궁수 새해 아침 과수원 농부로 장소성에 뿌리

2023-01-03

[시로 읽는 삶] 나는 충분히 사랑했을까?

나는 충분히 살았을까?/ 나는 충분히 사랑했을까?/ 올바른 행동에 대해 충분히 고심한 후에 결론에 이르렀을까?/ 나는 충분히 감사하며 행복을 누렸을까?/ 나는 우아하게 고독을 견뎠을까?   메리 올리버 시인의 ‘정원사’ 부분       질문이 많아지는 때가 있다. 시간에 대해 강박감이 몰려오는 나이쯤에 이르면 이 질문들은 때때로 자기 학대를 불러오곤 한다. “나는 충분히 살았을까?”라는 시인의 질문은 ‘그렇지 못했다’는 자책이 일부 깔려있기도 할 것이어서 질문은 후회를 동반하기도 한다.   지나온 길은 늘 미진하고 그래서 아쉽기 마련이다. 충분히라는 말에는 한계가 분명하지 않으므로 충분치 않았을 약간의 부분을 인정하며 아쉬워하게 된다.   최선을 다해왔다. 시간을 아끼려고 종종걸음을 치기도 했고 미움을 사랑으로 덮으려고 사랑의 문들을 활짝 열어젖히기도 했다. 충분히 산다는 것은 어쩌면 충분히 사랑한다는 말이기도 하리라. 삶이라는 바닥에 발을 딛고 동분서주하는 발걸음만이 아니라 가슴의 온기를 퍼 나르는 어떤 유동성 있는 넉넉한 행동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충분하다는 건 깊이와 높이와 넓이가 모두 흡족하다는 말이기도 하겠다.   무한한 시간성 안에서 유한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간의 횡포는 무자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살수록 줄어드는 시간의 화폭 위에서 무기력하다고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 밀도가 점점 낮아지는 시간의 질감, 그 허술함 안에서 충분히 살아가는 일, 충분히 사랑하는 일은 더 가열해져야만 가능한 것 아닐까 생각된다.   사랑이 아니라면 아침을 맞고 저녁을 보내는 소소한 일상에서 배어나는 단어들은 단순하고 지루할 뿐이다. 주어진 일에 전념하고 짬을 내어 신간을 들춰보는 다소 맥락이 있다고 여겨지는 시간조차도 뱉어놓은 단어들이 활기가 없기 일쑤다.     충분히 산 때문에 행복해지는 걸까? 충분히 사랑했기 때문에 감사한 걸까?     충분히 산다는 건 충분히 사랑했다는 방증 아닌가 싶다. 누군가를, 뭔가를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부산하게 발걸음을 놀릴 수는 없다. 몸이 파김치가 되도록 재바르게 잰걸음으로 걸을 수는 없다.   사랑의 이름으로 소진되는 에너지는 사랑의 이름에서 다시 얻는다. 그러므로 사랑은 그 스스로 역동이다. 그 스스로 활력이다.     먼데 사는 친구가 문자를 보내왔다. 날마다 분주하게 살고 있지만 맘은 허전하다는, 한 해를 보내며 회한이 섞인 문자다. 중년 여자들의 대화는 시간과의 조율에서 오는, 시간의 속도감을 감당하기 어려운 것에서 오는 막막함일 때가 많다. 우리 문자의 끝은 “아직 크게 아픈 곳 없고 가족과 이웃이 두루 평안하다면 올해도 대박을 친 것이다”라는 위안이었다.   그렇다 올 한 해도 충분히 살았고 충분히 사랑했다면 당신도 나도 대박을 친 것이다. 다소의 갈등과 어려움이 있었을지라도 시간의 협곡을 무리 없이 지나왔다면 그것이 최고의 대박 아니고 뭐란 말인가.     오늘 하루가 충분히 살아갈 날들과 충분히 사랑할 날들을 위한 건배사가 되었으면 좋겠다. 올 한해가 충분히 감사하며, 행복을 누리며, 고독조차도 우아하게 맞이하려는 내일을 위한 충분한 준비였으면 좋겠다. 스스로를 북돋우며 격려하며 삶의 최대치, 행복의 최고치를 이끌어내려고 애쓴 당신도 나도 한 해 수고 많았다. 조성자 / 시인시로 읽는 삶 사랑 최대치 행복 우리 문자 메리 올리버

2022-12-20

[시로 읽는 삶] 본능적 연대, 가족

새로 담근 김치를 가지고 아버지가 오셨다./ 눈에 익은 양복을 걸치셨다./ 내 옷이다./ 한 번 입은 건데 아범은 잘 안 입는다며/ 아내가 드린 모양이다.// 아들아이가 학원에 간다며 인사를 한다/ 눈에 익은 셔츠를 걸쳤다/ 내 옷이다./ 한번 입고 어제 벗어놓은 건데/ 빨래줄에서 걷어 입은 모양이다.   윤재림 시인의 ‘가족’ 전문       한 번 입고 벗어 놓았던 아들의 옷을 며느리에게 전해 입은 아버지, 당당하게 김치통을 들고 오신다. 아버지의 셔츠를 입고도 맹랑하게 뻔뻔한 아들, 네 것 내 것이 본능적 연대감 속으로 슬며시 잦아드는 진득하고 만만한 관계, 가족.     가족은 너무 오래되어 새롭게 조망되기조차 맥이 빠지는 명칭이다, 너무 진부하다고 여겨지고 그래서 더러는 피로감만을 주는 관계가 되어버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매일 대면해야 하고, 부딪쳐야 하고, 비비대야 하는 운명적 사이이다.     물리적 거리로는 가장 가깝지만 심적 거리로는 너무 멀기도 해서 가족의 일을 가족들이 더 모른다고 하는 관계, 애증의 최초 집단이면서 막다른 골목에 서게 되면 최후의 보루가 되곤 하는 게 가족이다.   가족은 생물학적 관계여서 운명적으로 형성된 관계라고 봐야 한다. 싫다거나 좋다거나 여하로 끓어버릴 수 없는, 생이 부지하는 한 벗어날 수 없는 무한의 철책이기도 하다. 사랑이 근간이 되는 사이라고는 하지만 가장 치열하게 반목하기도 해서 상처를 주고받기 일쑤이기도 하다.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지는 계절에 영화 한 편을 보았다. ‘노엘 다이어리’는 가족이라는 무채색 같은 주제가 그럼에도 가족이구나 하게 해주며 잔잔한 감동을 준다.     어린 시절 가족을 떠나간 아버지에 대한 분노로 35년 동안 아버지를 만나지 않고 살아가는 제이크는 베스트셀러 작가다. 어머니와도 오랫동안 연을 끊고 있던 그에게 변호사로부터 어머니의 부고 소식을 전해 듣게 되고 어머니가 살던 집과 유품을 정리하러 고향으로 내려간다. 집안을 정리하던 중에 레이첼이라는 여자가 찾아온다. 어린 시절 제이크를 돌봐주던 보모가 자신의 생모라며 보모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 보모는 혼전 임신으로 레이첼을 낳고 어느 가정으로 입양을 보냈다. 레이첼은 좋은 양부모를 만나 잘 자랐지만 생모에 대한 그리움은 어쩔 수 없어 생모를 찾고자 수소문 중이다.     제이크는 보모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버지뿐이라는 이웃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레이첼이 생모를 찾는 일에 도움을 주기 위해 망설이던 끝에 아버지를 찾아간다.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려고 나무를 베고 있던 아버지는 35년 만에 찾아온 아들을 맞고, 왜 가족의 곁을 떠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며 아들에게 진심 어린 용서를 구한다. 해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트리를 만들면서 아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렸을 아버지도 제이크와 레이첼도 모두 삶이 상처투성이지만 서로의 상처를 쓰다듬으며 용서라는 빛나는 선물을 받는다.   찬 계절 십이월에 크리스마스가 없었더라면 무엇으로 시린 마음에 온기를 줄 수 있었을까.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점점 위축되어가고 있지만, 크리스마스라는 말이 할러데이라는 말로 대체되고 있지만 어김 없이 용서라는 선물을 들고 찾아와 줄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날을 기다리는 마음은 변함없이 설레고 즐겁다. 조성자 / 시인시로 읽는 삶 본능 연대 관계 가족 본능적 연대감 시절 가족

2022-12-06

[시로 읽는 삶] 스스로 인지하든 못하든

사람들이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외톨이’로 여겨지는 것이다./ 당신은 혼자 있어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 혼자 있지 못해서 외로운 것이다./ 루소는 ‘사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사는 것보다/ 훨씬 덜 힘들다’고 말했다.   -마리엘라자르토리우스 ‘고독이 나를 위로 한다’ 부분       이틀이 멀다하고 총기사건이 일어나는 미국이다. 총기사건의 유형을 살펴보면 집단 내에서의 소외, 따돌림이 원인인 경우가 많다. 왕따를 당한 사람의 내면 분노가 자신을 향하면 자살로 이어지고 그 반대이면 총기 난사 같은 끔찍한 사건을 유발한다.     지난 13일 밤에 일어난 버지니아대학 캠퍼스 총격 사건의 범행 동기도 그룹에서의 소외가 원인일 가능성이 크다고 워싱턴포스트는 발표했다. 용의자인 존스 주니어는 풋볼 선수들이 탄 버스 안에서 총기를 난사 3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는 풋볼선수명단에 이름을 올렸지만 실전 경기에 출전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왕따는 학교폭력의 한 유형이다. 많은 학교에서 문제가 되고 있다. 왕따는 집단 내에서 다수가 특정인을 대상으로 해를 가하는 행위를 말한다. ‘집단 따돌림’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한 집단 안에서 우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집단에서 소외시키거나 괴롭히는 일종의 정신적 폭력이다.   왕따는 학교에서만 일어나는 일만은 아니다. 가족 내에서도, 직장 내에서도, 국가와 국가 사이에도 유사한 일이 일어난다. 일본의 ‘이지메’는 역사가 깊다. 서구권에서는 ‘bullying’이란 용어로 퍼져있고 기성세대들의 세계에서도 드물지 않다.   왕따의 전 단계는 은따라고 한다. 은근히 무시하고 따돌리는 경우다. 끼리끼리 모여 누군가를 은근하게 무시하는 행위는 어른들 사이에서도 흔하다. 친한 사람들끼리 모여 앉아 특정인의 옷차림이나 생김새를 화제 삼는 일은 얼마나 흔한가. 그냥 지나가는 말이라고 조금의 죄의식 없이 하는 행동들이 누군가에게는 죽고 싶을 만큼 큰 상처가 되기도 한다.   집단 따돌림을 행하는 가해자의 정신적 이유로는 스트레스를 약자에게 풀고자 하는 심리, ‘다름’에 대한 두려움과 이질감, 자신이 소수자였을 때 받은 핍박을 되갚는 심리, 집단의 응집력을 강화하는 수단, 열등감, 권한 과시, 등등을 들 수 있다고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그렇다면 가해자 역시 집단 안에서 살아남기 위한 심리적 방어기제로 누군가를 괴롭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언젠가 당한 왕따 트라우마의 극복책으로 다른 사람을 왕따시키거나 집단 안에서 소외당하지 않기 위해 선제적으로 힘센 다수의 편에 서기도 한다.       사회는 점점 과격해진다. 말은 물론 행동들도 그렇다. 폭력적이고 거친 단어들이 만연하다. 사람은 그가 누구이든 자존감을 지키고 살 권리가 있다. 사람이 가장 참기 힘든 것은 사람을 옆에 두고도 투명인간처럼 취급되며 무시당하는 일이다.   스스로 인지하든지 못하든지 우리는 한때 가해자이기도 했겠고 한때는 피해자이기도 했을 것이다. 오늘 나의 행동이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온다는 걸 모르지 않으면서도 번번이 오류를 범하고 사는 게 어리석은 우리다.     사람을 죽이는 게 창이나 칼만이 아님을 잘 안다. 은근한 비하의 눈빛이나 은근한 굴욕의 말로도 사람은 죽을 수가 있다. 누군가의 인생을 꺾어버리는 일에 가담한다는 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두렵고 슬픈 일이다. 조성자 / 시인시로 읽는 삶 인지 심리 집단 집단 따돌림 왕따 트라우마

2022-11-22

[시로 읽는 삶] 미래, 차가운 지평선

노인을 본다/ 나의 미래를 본다/ 섬뜩하다// 옆에 있는 미래를 보고도/ 현재는 변하는 게 없다// 미래가 후회하는 과거를/ 현재가 살아가고 있다// 사라진 다음 후회하지 말거라// 아버지는 과거에 대해 말한 거지만/ 미래에 대해 말한 것// 과거를 바꾸기 위해 미래에서 날아온 사람처럼 아버지가 서 있다    -하상만 시인의 ‘당신은 미래에서 온 사람’ 전문       미래는 밝고 환한 저편 어디쯤의 무지개인 줄 알았다. 미래는 꿈이라는, 희망이라는 깃발을 들고 기필코 다다라야 할 고지인 줄만 알았다. 미래는 삶의 방향성만을 놓고 보더라도 현재라는 고단함을 지나 한 번쯤 꽃피워보고 싶은 낙원의 한쪽이지 않았던가.   이제 나에게 미래란 노인의 자리라니. 시를 읽는 마음이 편치 않지만 그럼에도 이는 명백한 사실이어서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수많은 내일, 미래를 향해 걸어왔다. 미래라는 언덕 위에 이르면 뭔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아서 그 미래를 바라보며 현재를 이겨내곤 했다. 기대치에 미치거나 못 미치거나 미래라는 영역은 언제나 뜨거운 삶의 동력이 되곤 했었다.   나에게 미래가 노인일지라도 미래라는 말을 버리고 싶지는 않다. 미래가 없었더라면 삶은 얼마나 아득하고 황막했었을까. 미래라는 전조등을 켜고 여기까지 살아왔을 테니까. 노인이라는 단어의 내부를 바꿔 줄 활력을 찾을 수 있다면 미래는 여전히 빛나는 삶의 저편일 것이다.     연극동네에 ‘방탄 노년단’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고 한다. 노익장을 과시하며 왕성하게 연극무대를 누비는 원로 배우들이 많아지면서 생긴 말이라고 한다. 나이에 주눅 들지 않고 활발하게 사는 노년들에 대한 존경의 뜻으로 20~30대들이 붙여준 이름이라고도 한다.   일전에 한 지상파 뉴스매체를 통해 ‘방탄 노년단’을 소개하는 영상을 보게 되었다. 세분의 배우들을 소개하며 그들의 활약상을 보여주었는데 그 중 한 분은 신구 선생이다. 87세의 나이로 왕성하게 스크린과 연극무대에 선다. 또 한 분은 박근형 배우다. 83세의 나이로 최근 영화 ‘리멤버’를 개봉했다고 한다. 한 분은 79세로 아카데미 TV 부문 남우조연상의 화려한 이력을 지닌 오영수 배우다. 연극은 물론이거니와 패션잡지에 힙합 스타일의 옷을 입고 화보를 찍기도 한다. 나이라는 개념 자체가 바뀌어 가는 분기점에 이른 것 같기도 하다.     사람을 늙지 않게 하는 중요한 조건은 역할이라고 한다. 뭔가 할 일이 있다는 것은 나이에 상관없이 활력소가 된다. 관건은 노인들 스스로 의미와 가치를 찾아내는 일일 것이다. 좋아하는 일에 매진하는 진취성을 잃지 말고, 다가오는 시대의 물결을 감각하려는 노력, 끝까지 독립적으로 살아가려는 의지 같은 것들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 같다.   나이는 아무 죄가 없다. 나이를 먹으면서 쇠퇴하는 인지 감각과 육체의 노쇠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즈음에는 삶의 질이 향상되면서 스스로의 노력으로 몸과 정신의 건강을 잘 지켜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작고하신 소설가 최인호 선생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착지다”라는 말을 했다. 착지란 각종 기량을 보여준 체조선수가 안전하고 멋지게 경기를 마무리하는 안착의 기술을 말한다. 노년이란 인생의 착지 기간이다. 화려한 전성기를 누리다가도 착지 때에 기우뚱해서 인생을 망치는 경우를 종종 본다.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자기 보폭을 유지하며 흔들리지 말고 최선을 다하는 일이야말로 고난도의 착지 기술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조성자 / 시인시로 읽는 삶 지평선 미래 내일 미래 방탄 노년단 원로 배우들

2022-11-08

[시로 읽는 삶] 가을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가슴을 스치자, 깜짝 놀란 장끼가 건너편 숲으로 날아가 껑, 껑 우는 서러운 가을이었다//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엉덩이를 때리자, 초경이 비친 계집애처럼 화들짝 놀란 노루가 찔끔 피 한방울 흘리며 맞은편 골짜기로 정신없이 달아나는 가을이었다   -송찬호 시인의 ‘가을’ 부분       산책길, 잘 여문 도토리들이 후드득 떨어져 내린다. 한 알이 가볍게 정수리를 친다. 상수리나무 밑에는 도토리들이 수북이 떨어져 있다. 잘 익은 것들은 확장성이 좋다. 폭발력이 있기도 하다. 순환의 때를 알기에 떠나야 할 때가 언젠지 알고 있다. 미련도 여한도 없이 춤을 추듯 떠날 줄 안다는 건 내면의 벽화가 완성된 까닭일 것이다.       가을은 제 역량의 최대치에 이른 알곡의 축제다. 살아온 시간의 함축, 걸어온 날들의 자축연이다. 사과과수원이 풍기는 단내도 땅콩밭의 비릿함도 졸속이 아닌 시간과 바람과 햇빛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정직함이다. 스스로 껍질을 벗길 수 있는 것은 잘 여문 것만이 가능하다.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은 비로소 자유를 얻었을 것이다.     가을은 비어 있는 것조차도 그득하게 여겨진다. 뒷마당에 방치되었던 항아리 뚜껑 위로 굴러온 단풍, 볕이 모여들어 주위가 환해진다. 피로한 오후의 입가도 추켜 올라간다. 한 여름꽃을 피워내고 시들어가는 화초를 뽑아 버리려고 손을 대는데 뿌리를 지키려는 듯 단단하게 결속하는 흙의 응축이 느껴진다.     미처 거두지 못한 고추밭에서 따는 끝물 고추들은 장난이 심해 벌을 받는 악동들처럼 들쭉날쭉 고르지 않지만, 매운맛은 여전히 확고하다. 끝물이라는 말은 막내라는 말처럼 한계성이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서럽기도 하다.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아침 햇살은 너무 맑아서 울컥한다. 낙조가 만들어 내는 호수의 윤슬은 너무 아름다워 눈시울이 뜨겁다. 과하게 풍성하고 분에 넘치게 그득해서 받아 안는 품이 서럽다. 삶을 다스리는 진실은 다 슬픔과 조금씩 내통하는 것 같다.     멀리 있는 친구에게서 소식이 날아오고 오래 떨어져 있던 피붙이가 안부를 물어오는 계절, 따뜻함을 그러모아 월동준비를 해야 하는 이들에게 가을볕은 신비함이다. 유리창을 통과한 순한 볕이 발등에 모여 재잘대는 일이나 검버섯 핀 노인의 얼굴을 스치는 아침볕이 수억 광년 우주를 건너온 평화의 사도란 걸 부인할 수 없지 않은가.   인생의 가을도 잘 영글었다면 좋으련만 대개는 그렇지 못하다. 가을이 오기도 전에 낙오되기도 하고 설익어 맛을 내지도 못한다. 제대로 익지 못한 탓에 잘 떨어져 내릴 줄도 모른다. 노욕이라는 병을 얻기도 해서 추해지기도 한다. 가을에는 자신의 누추함이 잘 드러난다. 그래서 자기비하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지루하던 일상의 소소함조차 큰 발견에 이르게 하는 가을, 핥아먹는 막대사탕처럼 아껴 써야 할 것 같다. 너무 짧은 순간은 너무 짧아서 서럽다. 삶에 배정된 인연들도 그렇다. 지나온 시간 어디쯤인가에 서성이고 있을 사람도 너무 짧았으므로 아름답게 기억되는 것 아닌가 싶다. 권태의 그늘을 걷어내는 가을의 바람, 있는 것을 있는 대로 누리는 오늘이야말로 절정이다.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은 자유를 얻었지만 외로워질 것이다. 이 가을엔 누구라도 콩알의 자유와 외로움을 공손히 받아야 할 것 같다. 조성자 / 시인시로 읽는 삶 가을 끝물 고추들 장끼가 건너편 맞은편 골짜기

2022-10-25

[시로 읽는 삶] 생각의 가치, 시의 가치

“생각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노래할 가치가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찬양의 노래, 사랑의 노래, 슬픔의 노래가/ 있는 거지.// 너무도 많은 이름을 가진 신들에게 바치는/ 노래들.// 쓸쓸한 산속에서, 양들이/ 풀을 먹는 행위로 풀에게 경의를 표하는 동안/ 목동이 부르는 노래.// 아침의 빛 속에서, 별안간, 피어난/ 꽃들이 있는 곳을 알려주는/ 벌들의 춤-노래.   메리 올리버의 ‘그리고 밥 딜런도’ 전문       지인 한 분은 유명기업의 CEO로 마케팅분야 실력자로 알려져 있다. 몇 달 전 한국에 갔을 때 함께 식사했는데 요즈음 시를 공부하고 시인들을 자주 만난다고 했다. 시로 자서전을 쓰려고 한다고도 하며 몇 편의 시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분은 산업 일선에서 많은 경영성과를 냈고 그래서 아직도 현역으로 이름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 경영일선에서 체감되는 이야기를 나눴다. 미래는 산업경영에서도 시적 상상력이 요구되는 시대임을 강조하며 낯설지만 다가올 미래 가치에 대해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그는 밥 딜런의 음악과 인생의 무한한 가치에 대해 새롭게 다가간다고 했다. 밥 딜런이 동시대 뮤지션들에게는 물론이거니와 기업인들에게도 창조적 영향력을 주었다는 것은 이미 다 아는 바이다. 스티브 잡스도 생전에 존경하는 인물 중의 하나가 밥 딜런이라고 공식 석상에서 말하기도 했다.   밥 딜런이 큰 아티스트로 꼽히는 이유는 그의 노랫말이라고 할 것이다. 깊이 있는 철학적 메시지를 대중가요에 접목했다. 그의 노랫말을 텍스트로 하는 학위 논문이 제출되기도 했고 문학계 일부에서도 그의 음악을 시로 인정하는 움직임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2016년 노벨문학상이 밥 딜런에게 주어졌을 때 뜨악하게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선정위원회는 “미국 음악의 전통 안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해냈다”라고 문학상을 받을만한 이유를 전했다.   그는 어릴 때 시인 랭보를 좋아했고 이름도 영국 시인인 딜런 토머스에서 따올 정도로 시와 친숙하게 지냈다고 한다. 그의 노래들은 저항정신을 담고 있으면서도 세상과 인생을 바라보는 따뜻함을 잊지 않았다고 평가받는다.   한 방송국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기본적으로 가수라고 생각하십니까, 시인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나는 자신을 노래하고 춤추는 남자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저항 가요를 부르시냐?”는 질문에는 “내 노래는 다 사랑 노래요”라고도 했다.   그는 은유와 상징으로 노랫말을 쓰지만 어깨에 힘 얹지 않고 사랑에 몰입하며 춤추고 노래하는 자유로운 영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표명인 듯하다.   밥 딜런은 올봄 지금까지 녹음된 곡들과 앞으로 내놓을 신곡에 대한 음원 녹음 저작권을 소니뮤직엔터테인먼트사에 매각했다고 한다. 2021년 경제 전문지 포브스에 의하면 밥 딜런의 음악 저작권 가치는 3억2500만 달러라고 한다. 매각 대금이 어마어마하다는 건 짐작하고도 남는다.     왜 하필 소니냐며 저작권 매각을 놓고 말이 많았던 모양인데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할아버지’라는 범퍼 스티커를 자랑스럽게 자신의 차에 붙이고 있는 할아버지라고도 하니, 보통의 할아버지처럼 자녀들을 사랑하고 돈도 좀 물려주고 싶었던 것 아닌가 싶다.   “생각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노래할 가치가 있다.” 시의 첫 행은 밥 딜런의 말이다. 조성자 / 시인시로 읽는 삶 가치 생각 미래 가치 노래 슬픔 딜런 토머스

2022-10-11

[시로 읽는 삶] 눈물의 효능

(…)“인간의 얼굴은 감정의 괄약근이다. 그것은 시도 때도 없이 자주 풀려서 문제”라며 나는 양파를 썰면서, 네가 불편해할까 봐 너스레를 떤다.// (…)정확히 몸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눈물’을 담는 그릇이다.// 세월 따라 주름이 많이 간 그릇이 깨지기 전에 ‘눈물’이 다른 그릇으로 매일 조금씩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잘 옮겨지면 된다./ 휴일 늦은 저녁, 눈물이 듬뿍 들어간 나의 맛없는 요리를 맛있게 떠먹으려 너는 한참 전부터 커다란 숟가락을 들고 오직 사랑의 힘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김중일 시인의 ‘좋은 날을 훔치다-시라는 식당-’ 부분       눈물은 감정의 바로미터다. 눈물은 대체로 슬플 때 많이 나지만 기쁨이나 감동이 지나간 자리에도 눈물이 있다. 눈물이 난다는 건 오감이 자극되어 감정의 파도가 일기 때문일 터이다. 눈물에도 맛이나 밀도가 있지 않겠냐는 생각을 해본다. 슬플 때 흐르는 눈물과 기쁠 때 흐르는 눈물이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눈물의 진정성은 믿을만하다. 눈물의 빵, 눈물의 사죄 등등은 꽤 호소력이 있다. 그래서 읍소는 과오를 용서받을 수 있는 최선책이 되기도 한다. 이별과 눈물은 떼놓을 수 없다. 이별은 눈물을 거느린다. 부모를 떠나보내는 일,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슬픔의 극한에 다다르는 눈물이 있다.     눈물의 이야기가 있는 삶은 한 사람의 인생을 구축하는 바탕이 되기도 한다. 크게 성공한 사람 뒤에 눈물의 빵이 있는 것은 소설구성의 3요소 중 ‘배경’처럼 효과적인 장치가 되기도 한다. 이즈음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는 가수 임영웅의 눈물로 견뎌내던 시절의 이야기는 그의 재능까지 더 돋보이게 한다.   눈물은 눈을 보호하기 위해 또는 어떤 외부자극에 의한 최루성으로 흐르지만 신체적 기능이전에 희로애락을 받아내는 감정의 그릇이다. 슬픔이 흘리는 눈물보다 환희가 주는 눈물이 더 뜨거울 때가 있다. 그래서 눈물의 양면성은 어떤 삶도 구차하지만은 않게 해주고 감정을 얽힘을 풀어주는 청량제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눈물은 소통을 위한 또 다른 언어다. 아기들은 눈물로 말을 한다. 여자의 눈물은 설득력이 있고 호신술이 되기도 한다. 이스라엘 한 연구팀에서 연구했다. 20대 남성을 두 그룹으로 나눠 한쪽은 여자들이 슬퍼서 흘린 눈물을, 다른 한쪽은 일반 식염수를 냄새 맡게 했다. 여자들이 슬퍼서 흘린 눈물을 냄새 맡은 그룹 남자들은 심장박동과 호흡이 안정적이 되고 남성호르몬도 줄어들어 공격성도 낮더라고 한다.     눈물로 지은, 그러나 맛은 없는 밥을 먹겠다고 커다란 숟가락을 들고 기다리는 모습을 사랑의 힘으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는 시인의 말은 사랑의 근간은 눈물 아니냐는, 눈물 없이 사랑은 꽃피우지 못한다는 의미 리라.     나이가 들수록 눈물이 많아진다고 한다. 드라마를 보며 우는 초로의 남자들이 있다. 세상 사람이 다 불쌍하다며 슬퍼하는 여자도 있다. 울어야 할 일이 많아지는 것은 마음의 굳은살이 점점 물러지고 몸이 울음의 효능을 알게 된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눈물이 많다는 것은 살아온 궤적이 신산하다는 것이기도 하다. 눈물은 슬픔을 풀어주는데 으뜸이다. 마음을 정화하는 치유능력을 지닌 매혹적인 심리 기제이기도 하다. 웃음 못지않게 울음도 건강한 몸과 마음을 지켜주는 약이다. 조성자 / 시인시로 읽는 삶 눈물 효능 이별과 눈물 저녁 눈물 그룹 남자들

2022-09-27

[시로 읽는 삶] 명절 단상

흙냄새 나는 나의 사투리가 열무맛처럼 담백했다/잘 익은 호박 같은 빛깔을 내었고/ 벼 냄새처럼 새뜻했다/ 우시장에 모인 아버지들의 텁텁한 안부인사 같았고/ 돈이 든 지갑처럼 든든했다   -맹문재 시인의 ‘추석 무렵’ 부분       명절은 전통적으로 해마다 지켜오는 날로 조상에게 차례를 올리는 큰 의미가 있다. 이즈음에 와서는 멀리 떨어져 있던 가족들을 명절을 계기로 만나는 가족 모임의 의미가 더 커져 간다.   명절이 되면 두통을 호소하는 여자들이 많아진다. 제사라는 고유한 형식을 치러야 하므로 그에 맞은 음식을 장만해야 한다. 이즈음엔 많이 간소화되기도 하고 차례 음식을 시장에서 만들어 파는 곳이 있어 수월해졌지만 그래도 아직 많은 이들에게는 상당한 스트레스를 주는 것 같다. 명절을 치르고 나면 이혼소송이 늘어난다는 말도 있는 걸 보면 명절 후유증이 생각보다는 큰 모양이다.   얼마 전 추석을 앞두고 ‘성균관의례정립위원회’라는 기관에서 차례상 표준안을 내놓았다. 설문조사, 예법 등을 두루 고려하여 표준안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차례상의 간소화를 제시한다.   삼색나물, 과일(사과, 배, 밤), 송편, 적, 물김치를 표준안으로 내놓았다. 흔히 명절에 먹던 전(어전, 육전, 소전)이 제외되었다. 전이 제외된 이유는 전을 부치는 데 시간이 많이 소요되고 번거롭기도 하다는 것이다. 원래는 제사에 전은 올리지 않았었다는 설명이다.     여자들의 명절후유증이크다 보니 성균관에서까지 나서야 했다는 게 웃음이 난다. 요즘은 명절날 해외여행을 가는 가족들도 있고 여행지에서 조상께 술 한 잔을 올리는 것으로 제사를 대신하는 가족들도 있다고 하던데, 아직도 명절 스트레스가 여자들에게 두통을 유발하다니.   성균관에서 내놓은 차례상 표준안을 보자니 상이 좀 빈약해 보인다. 제사음식이란 게 산 사람 먹는 것이고 풍성하고 넉넉함으로 북적대고 나눈다는 의미의 명절 분위기를 생각한다면 어쩐지 씁쓸하다.     제사상의 간소화로 여자들의 수고를 덜 수 있다면 다행이긴 하겠으나 정작 명절 때 여자들이 두통을 일으키는 것은 음식의 가짓수 때문은 아닐 것이다.   여자들이 명절을 기피하는 이유는 가족들의 동참이 없다는 데 있는 것 아닐까 싶다. 보통 가정의 명절 풍경을 보자. 여자들은 부엌에서 음식을 준비할 때 남자들은 오랜만에 동기간이 만났다고 술상에 모여 앉거나 차를 마시며 담소를 즐긴다. 며느리라면 음식을 먹고 뒷일까지 마무리해야 한다. 여자는 가족이 모인 곳에 동참도 못 해보고 파김치가 되어 돌아온다.   가족들이 음식 만드는 일을 거들어 주고 설거지도 함께 해주면 여자들이 전을 부치니 마네 하며 투덜대지는 않을 것이다. 명절이 여자들에게도 즐거운 날이 되려면 남자들의 생각이 조금만 바뀌어도 될 것 같다.     명절 때마다 갈등을 겪는 것도 오육십 대가 마지막인 것 같다. 젊은 세대들은 명절을 연휴 정도로 생각할 뿐이고 이미 남성과 여성의 가사일 분담이 자연스러워져 가고 있다.   명절은 가족의 유대를 이어주는 좋은 풍속이다. 여자건 남자건 명절이 즐겁고 반가운 날이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명절의 분위기를 그르치지 않도록 가족들의 협조가 필요하다. 여자가 행복해야 가정이 행복하고 세상도 평화로워 진다. 전통이라는 아름다운 풍속도 지켜가려는 행복한 여자들이 많을 때 보존될 것이다. 조성자 / 시인시로 읽는 삶 명절 단상 명절 단상 명절날 해외여행 명절 스트레스

2022-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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